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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김대중(2001년 2월)

인동초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한자: 金大中, 1925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1998년~2003년)이자 독재자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이다. 인동초,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고도 불렸던 김대중은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 생애 편집

파일:김대중1971.jpg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출생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이후 생일을 1925년 12월 3일로 바꾸기도 하였다. 출생지는 전라남도신안군 하의도이다. 1943년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선박회사 직원으로 취직한 김대중은 곧 선박회사의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며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며 큰돈을 벌었다. 한국전쟁 당시 사업가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김대중은 이승만 정부 시절이던 1954년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당선 3일 후 박정희5.16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어진 1963년 총선과 1967년 총선에서 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박정희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1971년 대통령선거에 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득표율이 45.2%에 그치면서 53.2%의 득표율을 받은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로 패배하였다. 당시가 군부독재 시절임을 감안해 본다면, 이는 사실상 김대중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뛰어난 연설가였던 김대중은 자신의 확고한 지지층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김대중의 지지율은 95%에 이르렀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치사를 통틀어서도 유례없는 기록이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비판한 김대중은,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 정보기관원에 납치되어 연행되었다. 이후 김대중은 2000년 노벨 평화상 연설 당시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회고하였다.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저는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긴급뉴스에 경악했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은 저를 일본 해안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 가서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머릿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는 죽음의 찰나에서 구출 되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2000년 노벨평화상 연설

김대중은 이후 서울로 무사히 돌아왔으나,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이후 김대중은 1976년 명동성당에서 3ㆍ1민주구국선언 발표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1978년,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이 기간 동안, 국제사면위원회는 김대중을 양심수로 지정하며 김대중의 사면을 촉구하였다. 김대중은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비로소 정치적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곧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신군부 독재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김대중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폭동 선동 등의 혐의로 1980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후 미국 정부의 중재로, 김대중은 20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보스턴에 정착하며 하버드 대학교 초빙 교수로 일하였다. 미국에서 김대중은 미국의 여러 유명 신문사에 전두환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고문을 여럿 썼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받기 1주일 전인 1980년 12월 11일, 김대중의 선처를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전두환에게 보낸 바 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편집

1985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여당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1987년 전두환이 국민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고, 직접선거 형태로 열리게 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김대중과 김영삼이 야당 측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했다. 하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끝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야당 표가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전두환과 같은 군인 출신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노태우는 단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될 수 있었으며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김영삼은 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3당 합당을 통해 통합 민주자유당(이후 한나라당이 됨)을 출범시켰다.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김영삼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가볍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선거은 김대중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선거 직전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민들이 김영삼 정부와 여당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으며, 40.3%의 득표율로 김영삼이 밀어주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회창의 득표율이 38.7%, 이인제의 득표율이 19.2%임을 감안해 볼 때 보수표가 이회창과 이인제로 갈리는 바람에 김대중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김대중은 전라도 지역 출신의 첫 대통령이라는 의의도 있다. 김대중에 앞서 대통령을 지냈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고 이에 따라 경상도는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소외되어 있었으며 발전이 더디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민들은 전라도 출신의 김대중을 높은 지지율로 밀어주었다. 덕분에 광주광역시의 김대중 후보 득표율은 97.3%에 이르는 등, 김대중은 전라도에서 많은 득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통령 임기 편집

경제적 성과 편집

김대중은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즉각 경제개혁을 밀어붙이고 IMF에서 요구하던 구조조정을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덕분에 1998년 -5.8%을 기록하던 경제성장률은 1999년 10.2%로 급상승하였다. 김대중의 경제 정책은 재벌 위주의 한국 경제를 더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들었다. 대기업들에 지급되던 국가보조금은 거의 모두 철폐되었다.

대북정책 편집

김대중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로 풀이될 수 있다. 김대중은 북한과의 온건한 외교 관계를 추진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 2000년에는 김정일과 함께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이는 지난날의 남북대결 구도를 청산하고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은 이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이루기 위해 적어도 수억 원이 넘는 뒷돈이 평양에 전해졌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일부에서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퍼주기식 대북정책”이라고 비난하였다.

서거 편집

2009년 7월 13일 폐렴 증상이 의심되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 과정에서 합병증으로 병세가 악화되다가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했다. 장례는 2009년 8월 23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치러졌으며 국장 형태로 진행되었다. 서울 동작현충원에 묘역이 조성되었다.

외부 링크 편집

ROKPresi 대한민국 대통령 ROKPresi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